이토 마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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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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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성|{{{#fff 일본국 제109대 외무대신]] 이토 마사요시 伊東正義 | Masayoshi It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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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3년 12월 15일 | ||||||||||||||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츠시 | |||||||||||||||
사망 | 1994년 5월 20일 (향년 80세) | ||||||||||||||
도쿄도 | |||||||||||||||
재임기간 | 제109대 외무대신 | ||||||||||||||
1980년 7월 17일 ~ 1981년 5월 18일 | |||||||||||||||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1] 68,69대 내각총리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의 사망으로 인한 권한대행 | |||||||||||||||
1980년 6월 12일 ~ 1980년 7월 17일 | |||||||||||||||
제43대 내각관방장관 | |||||||||||||||
1979년 11월 9일 ~ 1980년 7월 1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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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중의원 (9선),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 겸 내각관방장관, 외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할아버지 이토 켄스케는 아이즈 번의 번사였으며 아버지 이토 히데사부로는 아이즈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구제 아이즈중학교를 거쳐 사이타마현에 이사 와 구제 우라와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1. 농림성 공무원 시절[편집]
도쿄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농림성 촉탁직으로 입성해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일본 제국이 중국 대륙 경제를 장악하기 위해 몽강국 내각에 조직한 '흥아원'에 파견되어 오히라 마사요시와 사사키 요시타케와 동업하며 인연을 쌓게 된다.
전시 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하여 농림성 농지국장과 수산청 장관을 역임하고 1962년 농림성 사무차관을 끝으로 농림성 공무원직에서 퇴직했다.
2.2.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인연[편집]
1963년 열린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후쿠시마현 제2구에서 첫 당선되었고 당선 후 친한 친구인 오히라 마사요시가 속해있던 이케다파 (굉지회)에 가담했다. 파벌의 대표인 이케다 하야토에게 "자네는 이케다파라지만 사실은 오히라파로군"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오히라와 친분이 깊었다.
오히라가 후쿠다 다케오의 뒤를 이어 자유민주당 총재에 취임하면서 재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오히라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을 때는 내각관방장관으로 오히라의 직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80년 오히라 마사요시를 둘러싼 여러 문제로 자유민주당 내부 주류 파벌인 후쿠다파와 미키파의 갈등이 극화되어 결국 두 계파 소속 의원들의 불참과 함께 '오히라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어 일명 '해프닝 해산'과 함께 국회가 해산되어 중의원, 참의원 동시 선거가 실시되었고 유세 도중 부정맥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였다.
오히라의 입원 중에는 이토가 대신 친구로서 집안일을 맡아주었고 1980년 6월 12일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급사하자 절차상 이토는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에, 니시무라 에이이치는 총재 대행에 취임했고, 현행 내각을 총사퇴시켜 차기 총리가 선출될 때까지 임시 내각인 '직무 집행 내각'을 구성하여 약 한 달 간 내각을 이끌었다.
2.3. 포스트 오히라[편집]
포스트 오히라를 놓고 당연히 이토의 이름도 거론되었고, 가토 고이치[2]
1939 ~ 2016, 내각관방장관과 방위대신,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역임했으며, 더욱이 일본 정부의 군 위안부 동원 관여 및 강제성을 처음 인정하였다.
1930 ~ 2016, 노동대신, 통상산업대신,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을 역임했으며, 후지급행의 前 회장이다
2.4. 포스트 다케시타와 그 후[편집]
외무대신 퇴임 이후 1989년 리크루트 사건에 휘말려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리직에서 사퇴하자 당시 당 중역 중 한 명으로 사건에 휘말리지 않은 이토의 이름도 거론됐지만 완강히 거부했고 이후 고토다 마사하루[4]
1914 ~ 2005, 경찰청 장관, 내각관방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평화헌법 수호와 반전운동, 아시아외교 중시 등의 목소리를 내며 당시 일본 정치권의 우경화를 견제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의 관방장관 재임 당시 '방위비의 국민총생산 1% 달성 정책', '페르시아만 소해정 파견 표명' 당시 극심하게 반대했던 인물이다.
1994년 5월 20일, 폐렴이 악화되어 도쿄도 모처의 자택에서 향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후쿠시마 2구 | | 54,969 (14.3%) | 당선(3위) | 초선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7,198 (14.9%) | 낙선(6위) |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4,966 (26.3%) | 당선(1위) | 재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2,052 (16.9%) | 3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6,844 (15.5%) | 4선 | |||
1979 | 제35회 일본 즁의원 의원 총선거 | 74,346 (17.6%) | 당선(3위) | 5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1,135 (25.7%) | 당선(1위) | 6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2,344 (19.7%) | 당선(2위) | 7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9,187 (23.0%) | 8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4,475 (22.8%) | 당선(1위) | 9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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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8,69대 내각총리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의 사망으로 인한 권한대행[2] 1939 ~ 2016, 내각관방장관과 방위대신,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역임했으며, 더욱이 일본 정부의 군 위안부 동원 관여 및 강제성을 처음 인정하였다.[3] 1930 ~ 2016, 노동대신, 통상산업대신,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을 역임했으며, 후지급행의 前 회장이다[4] 1914 ~ 2005, 경찰청 장관, 내각관방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평화헌법 수호와 반전운동, 아시아외교 중시 등의 목소리를 내며 당시 일본 정치권의 우경화를 견제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의 관방장관 재임 당시 '방위비의 국민총생산 1% 달성 정책', '페르시아만 소해정 파견 표명' 당시 극심하게 반대했던 인물이다.